살인자들, 범죄자들

한국전쟁, 살인의 서막

 

1950년 1월 에치슨 선언[각주:1] 10일 뒤,

스탈린은 꼭두각시 김일성에게  충동질하는 문서를 보낸다.

미국이 한반도에서 신경을 껏으니(국제 정세가 변함) 

먼저 남침을 하면 돕겠다며 꼬드기는 극비 문서였다.

 

(자기 손에 피 안 묻히고 중국과 북한한테 피 묻히라는 문서다.

소련은 한국전쟁에서 인명피해가 한 명도 없다.)

 

6.25 전쟁 인명 피해

 

막말로 집단살인을 하라는 지령인 것이었다.

그 지령을 따라

 "한국전쟁이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었고" 

 

그렇게

광기에 찬  전쟁 살인이 시작된 것이었다.

 

▲미국 애치슨라인 발표, 소련 스탈린, 중국 마오쩌둥, 북한 김일성_ 살인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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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 애치슨 연설과 미국의 전쟁 계획의 관계?

 

1952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선 아이젠하워는 선거유세에서, "애치슨이 극동방위선에서 한국과 같은 아시아 대륙을 제외하여 공산군의 침략을 불러들였다"고 애치슨 연설을 비판했다.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의 프레스클럽 연설, 즉 "아시아의 위기 :미국 정책의 한 시험대"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아이젠하워의 비난과 마찬가지로, 잭 스나이더도 애치선 연설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 "1950년 1월-6월 동안, 트루먼 행정부는 미국의 방어선에서 남한과 대만을 포함하는 것에서 이 두나라를 배제시키는 것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Jack Snyder, Myths of Empire:Domestic Politics and International Ambition. p.290]

 

그렇다면, 미국의 전쟁을 기획하는 합동참모본부는 소련과의 전면전에 대비, 어떤 비상전쟁계획을 마련했고, 이 계획에서 한국은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었을까?

 

남시욱의 논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았다.

 

비상전쟁계획 수립 작업은 합참의 합동전쟁계획위원회(Joint War Plans Committee, JWPC)에서 맡았다. 주목할 점은

JWPC가 한국전쟁 이전까지 입안한 비상전쟁계획들은 예외 없이 소련과의 전면전쟁이 일어날 경우 한국은 전략적 관점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규정하고, 일단 유사시 한국에 있는 미 지상군병력을 우선 일본으로 철수하도록 한 사실이다. 그 만큼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한 것이다.

 

최초의 전쟁계획인 1946년 핀처 작전개념 Concept of Operations Pincher은 소련과의 전면전이 일어날 경우 극동에서는 미군이 공군력으로 아시아 대륙의 적 목표물을 공격하기 위해 일본, 특히 오키나와를 중심지로 기지를 건설하기로 했다. 

극동지역 미군의 임무는 알류션열도-일본-류큐열도(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도서사슬을 방어선으로 확보하는 것이 골자이다. 핀처 작전개념은 이와 아울러 남한에 주둔 중인 2개 사단의 병력을 포함한 약 5만7,000명은 소련과의 전면전의 경우 소련군의 침입으로 입을 손실을 막기 위해 신속하게 일본으로 사전 이동하도록 했다.

 

비록 핀처 작전개념이 합참의 승인을 받지 못했지만, 1946년 11월 맥아더의 다음 발언은 핀처 작전개념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핀처 작전개념이 완성된 8개월 후인 1946년 11월 극동군최고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소련과 전면전을 벌일 경우 남한에 주둔중인 하지(John R. Hodge) 장군 휘하의 24군단 소속 2개 전투사단은 일본방어를 위해 철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런 작전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맥아더가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식에 참석해서 다음 발언을 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즉 맥아더는 이승만이 미군의 지원에 대해 묻자 남한이 공격을 받는다면 미국은 “캘리포니아 주를 방어하는 것처럼” 남한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거라고 약속했다고 한다. 작전 개념이 그동안 변한 것인가 아니면 무책임한  립서비스였을까?

 

1947년 8월 29일의 문라이즈 작전계획도 핀처 개념을 계승하여, 소련 적군이 공격을 개시하는 즉시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할 것을 건의했다. 한국에서 철수하는 병력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본토를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문라이즈 전쟁계획은 핀처작전 개념과 마찬가지로 계획의 초안단계(JWPC 476/1)에서부터 대소전쟁에서 베링해협-동해-황해를 잇는 도서방어선을 우선 확보하도록 했다.

 

핀처 계획보다 3년후인 1949년에 나온 오프태클 계획은 태평양지역의 분명한 방어선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경우 한국을 소련군이나 그 동맹군에 유린될 나라로 상정했다. 오프태클 계획은 소련과 그의 동맹국들의 공격에 의해 미소 간에 전면전쟁이 일어날 경우 한국을 포함한 7개 지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다음 국가들은 영미세력권과 동맹하기를 원하겠지만 그들 나라의 정치적 또는 전략적 상황이 너무도 불안정하기 때문에 이들 나라에 의존할 수가 없다. 아마도 그들은 소련에게 신속히 유린될 가능성이 있다. 이들 국가는 오스트리아, 그리스, 이란, 핀란드, 서독, 남중국, 남한이다."

 

한국은 포기되는 나라로 분류되었다.

 

1949년 3월 맥아더 장군이 영국 기자 프라이스에게 공개한 태평양방어선에서도 남한과 대만은 제외되었다. 맥아더는 다음을 공개했다.

 

"아시아에 대한 우리의 방위력배치계획은 미국대륙 서부해안을 근거지로 한다. 태평양은 과거에는 적이 〔미국을〕침입하는 접근통로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현재 태평양은 앵글로 색슨 민족의 호수가 되었으며, 우리의 방어선은 아시아 대륙 해안선을 둘러싼 섬들의 사슬들을 지나간다. 이 방어선은 필리핀에서 출발하여 주된 요새지인 오키나와를 포함하는 류큐열도를 지나간다. 그리고는 일본과 알류산열도를 거쳐 알래스카에 이른다. 중국 홍군(紅軍)의 전진배치로 이들 지역들이 그들의 측면에 놓일지라도 아시아대륙에서 우리의 유일한 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중국군이 상륙작전 병력을 공급하기에 충분히 가까운 산업기지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참고>남시욱, 딘 애치슨과 미국의 한반도 정책-한국전쟁 시기를 중심으로, 서울대 박사논문, 

 

-그렇다면, 1950년 1월 애치슨의 연설은 미국 합참의 전쟁계획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출처>http://kk1234ang.egloos.com/v/3038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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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은 일루미나티 작품

 

 

 

미국의 정치 평론가 제임스 퍼를로프에 의하면, 동유럽과 중국의 공산화는 일루미나티의 각본이었으며, 미국은 동맹이라는 명분하에 소련에 무기를 지원함으로써 또한 병사들을 속여서 자신의 군대를 교묘하게 제어함으로써 공산주의의 팽창을 도왔다는 것입니다. 또한 역대 미국의 적은 모두 스스로 만든 것이며, 미국의 실제 지배세력은 공산주의자들이라 합니다. 바로 "바빌로니안 탈무디즘"과 "카발라"를 섬기는 사바테안/프랑키스트 세력입니다.

 

한반도의 남북 분단과 한국 전쟁도 배후에서 미국을 지배하는 특정 세력의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원래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질 이유는 전혀 없었으나, 적의 창조를 통해 각자의 대중들을 결속시킬 수 있는 모티브를 제공하는 의미에서 절반씩 갈라먹는 대치상황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정(正), 소련이 반(反)이 됨으로써, 두 요소의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합(合)이라는 결과를 도출해 내고자 하는 의도라고 합니다. 이 합이 될 뉴 월드 오더의 세계 정부를 추구하는 세력이 있으며, 한반도의 비극은 바로 이 세계 정부의 초기 모델인 "유엔"의 존재 이유를 세계가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미·소 합의하에 만들어진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한국전쟁은 평화유지자로써의 유엔을 세상에 입증하기 위한 연극이자, 세계 정부에 동의하게 만드려는 작전이었으며, 38선과 휴전선이 실질적으로 거의 같다는 것은 이 전쟁이 인구 축소를 동반한 그저 한 판의 광대극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월남전도 한국전쟁의 재탕이었으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내전 또한 똑같은 사기극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7년은 볼셰비키 혁명 100주년인데, 혹시 무슨 기념행사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제임스 퍼를로프의 글이 6-25 전쟁과 시온주의, 뉴 월드 오더의 의미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한국전쟁 : 일루미나티의 아젠다를 위한 갈등

 

제임스 퍼를로프 : 

The Korean War: Another Conflict that Served the Illuminati Agenda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공산 독재자 김일성은 그의 군대를 보내 남한을 침공했다. 미군은 유엔의 이름으로 남한을 방어하러 왔고, 3년간의 혈투끝에 전쟁은 휴전으로 결론났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김일성과 공산당이 북한의 권좌에 오를 수 있었는가? 미국의 해외 정책이 그들을 권좌에 올려 놓았다. 그것은 우회적인 방법이었다.

 

 

 

남북분단은 뉴 월드 오더로 가는 중간단계

 

2차 대전중 미국은 유럽에서 독일과 싸웠고, 아시아에서는 일본과 싸웠다. 죠세프 스탈린의 폭정 치하였던 소련은 이 전쟁에서 미국의 "우방"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독일과만 싸웠고, 일본과는 불가침 조약을 지켰다.

 

그러나 테헤란과 얄타의 "빅3" 회담(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모두 동일한 마스터를 섬기는 33° 프리메이슨 유대인이다)에서, 루스벨트 대통령은 스탈린에게 일본과의 불가침 조약을 깨고 태평양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주문했다. 스탈린은 동의했다. 소련 극동군의 원정에 필요한 모든 무기와 차량, 물자를 미국이 지원해주는 조건이었다.

 

이것은 터무니없이 결정된 해외 정책이었다. 스탈린은 잘 알려진 침략자이다. 2차 대전의 공식 개전이었던 1939년 폴란드 침공은 사실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의 연합 공격(joint venture)이었다. 1940년, 스탈린은 핀란드,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를 침공했고 루마니아를 병합했다. 그가 아시아에 자비를 베풀 것이라고 믿을 사람은 없었다. 

 

"미국이 일본과 전쟁하기를 바라는 소련 정부의 희망은 간절하다. 소련은 일본이 완전히 패배할 때까지 일본과의 대결을 피하려고 할 것이다. 그들은 일본 패망을 만주를 얻고 중국을 공산화하는 기회로 삼을 것이다." - 주 소련 미국대사 윌리엄 C. 불릿

 

스탈린은 전쟁이 끝나기 5일 전까지 극동에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일본은 이미 원자폭탄을 얻어 맞고 항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중국으로 들어간 소련군은, 매우 제한적인 전투끝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냈고 막대한 무기고를 차지했다. 소련군은 미국이 대여해 준 무기들과 일본군으로부터 포획한 무기들을 마오쩌뚱의 공산혁명군에게 넘겼다. 때문에 중국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를 뒤집을 수 있었다.

 

 

 

남북분단과 신탁통치는 미국의 아이디어

 

이 전에, 한국은 일본의 보호령이었다. 1944년 4월 외교협회 (CFR: Council on Foreign Relations) 잡지 Foreign Affairs 는 "전후 세계의 한국"이라는 글을 출간했다. 이 글은 러시아와 함께 한국을 신탁 통치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스탈린은 이 제안에 동의했고 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소련은 북한을 얻었고, 미국은 나머지 남부 절반을 얻었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이 새로운 국제 기구가 임무를 적시에 수행할 수 있을까? 저자에게는 가능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특정 국가들의 신탁 통치보다는 권력 집단 즉 미국, 영국, 중국, 러시아에 의한 신탁 통치의 가능성은 있다."

 

태평양 전쟁에서 소련이 거의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음을 감안할 때, 자신의 인민 수백만을 학살한 것으로 유명한 독재자 스탈린에게 북한의 취득은 거대한 성공이었다. (소련은 미국 덕분에 중국과 북한을 거저 얻었다). 스탈린은 재빠르게 김일성 정권을 수립했고, 15만의 병력과 수백대의 탱크, 전투기, 대포를 가진 군대를 만들었다. 반면 미국은 가진 것이라곤 소형 화기 뿐인 1만 6천 정도의 남한인 경찰 병력만 남겨 놓고 떠났다.

 

멈추지 않는 공산주의의 확장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이 불균형은 남한 침공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김일성은 1949년 마오쩌뚱(스컬 & 본스)의 공산 정권이 안정화될 때까지 기다렸다. 마오쩌뚱은 그의 뒤를 지켜줄 것이기 때문이었다. 1950년 1월, 김일성은 "한국 통일의 해"를 천명했고, 완벽한 전쟁 준비를 지시했다. 2주 후, 미국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인물중의 하나인 국무장관 딘 애치슨(CFR 멤버, Scroll & Key, 300인 위원회)은 마치 김일성에게 무언가 선물을 주려는 것 마냥, 남한은 극동에서 미국의 "방어선" 바깥에 있다는 연설을 한다.

 

 

 

애치슨 라인은 들어오라는 사탄의 메시지

 

애치슨은, 만약 이 "방어선" 바깥에서 어떤 공격이 발생한다면 피해자는 유엔 헌장에 의거한 전체 문명 세계의 책임에 의지해야 한다고 천명했다. 이 발언은 일루미나티의 아젠다에서 한국 전쟁이 맡을 역할과 밀접하다. 일루미나티는 사탄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세계 지배를 노린다. 바이블은 적그리스도 또는 "짐승"이 모든 부족, 사람, 언어, 국가를 지배할 것이라고 계시하고 있다. (계시록 13:7).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선 세계정부가 필요하다. 이것은 자명하다.

 

명백하게 예언적인 "시온 장로들의 의정서"는 세계 정부를 공개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이 의정서가 가짜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Truth Is a Lonely Warrior 18장을 보라. 예를 들면, 의정서 5장 11절에서 저자는 "그들의 카르텔이 점진적으로 모든 국가를 흡수할 것이며 "수퍼 정부"를 구성할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다.

 

 

 

유엔은 외교협회(CFR)의 창조물

 

미국에서 점진적 세계 정부의 수립 임무는 1921년 설립된 외교협회(CFR)에게 맡겨졌다. 외교협회는 미국의 국제 연맹1 가입을 결정한 1920년 베르사이유 조약2에 대한 상원의 거부를 해결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국제 연맹이 실패한 후 그 승계자는, 당연히도, 국제 연합(UN)이었다. 유엔의 설립 계획은 비밀히 국무부의 CFR 회원들에 의해 구상되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비공식 아젠다 그룹"으로 불렀으며, 이 거슬리지 않게 들리는 이름은 그들이 계획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의회의 의심을 없애기 위해서 신중하게 선정되었다.

 

1. 국제 연맹 (League of Nations) : 국제 연맹은 1차 대전이 끝난 1920년 일루미나티들이 주도한 파리 평화 조약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로스차일드의 심복들 즉 일루미나티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로 만든 세계정부 최초 모델 "비엔나 의회"를 러시아의 짜르가 무산시켰기 때문에 로스차일드가 세계정부의 최대 장애물인 짜르를 없앨 계획을 수립한 것이 볼셰비키 혁명이다.

 

2. 베르사이유 조약 : 파리 평화 조약 5개 항목 중 하나, 독일 식민지를 영국과 프랑스에게 할당하는 것과 독일에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물리는 것이었음.

 

1945년 유엔의 창립 총회가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렸을 때, 미국 대표의 대부분인 47명은 CFR 멤버였다. 후일 소련의 스파이로 판명된 앨저 히스가 이 총회의 총장이었다. 이 때 상원은 국제 연맹과 마찬가지로 유엔을 거부할 것이었기 때문에, 일루미나티는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히스는 잠겨진 금고에 담긴 유엔 헌장을 들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워싱턴으로 날아갔다. 대표단의 재잘스러운 확담 후에, 유엔 헌장은 상원의 인준을 받았다. 당시 유엔 부지 구입비 850만 달러를 기부한 건 존 D. 록펠러였고, 오랬동안 회장을 지낸 그의 동생 데이비드는 CFR의 명예회장이었다.

 

 

 

세계 정부로써의 유엔의 가치 입증

 

일단 유엔이 설립되자, 그 다음 단계는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평화 유지자로써의 유엔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필요했다. 유엔 헌장에 적혀있는 그 존재의 첫번째 목적은 "국제 평화와 안보 유지"였기 때문이다. 이 각본을 위해서 필요했던 것이 한국 전쟁이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거의 2년이 지난 1952년 4월, 아들라이 스티븐슨은 다시 외교협회(CFR) 잡지 Foreign Affairs 에 "한국의 전망"이라는 글을 썼다.

 

"내 주장의 요지는, 생존 가능한 집단적 안보 시스템 수립을 향한 역사적 진전을 한국에서 이루어냈다는 우리의 경험적 의미에 기반하고 있다." 

 

"집단 안보"라는 문구는 위선이다. 한국 전쟁 기간 중 유엔군의 90%는 미군이었다. 비록 15개의 다른 국가들이 군대를 보내긴 했지만, 그것은 수치로 말하면 상징적인 극히 작은 것이었다. 수만의 미군들이 유엔 깃발 아래에서 숨졌다.

 

국제 연맹에 대한 의회의 반대는 대부분 이 초국가 정부가 미국 주권에 위협이 될 것이라는 전망에 근거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유엔의 행동은 그 동안의 걱정을 불식시켰다. 시온 장로들의 의정서 10장은 다음과 같이 계시한다.

 

"우리는 조만간 대통령의 책임을 분명히 할 것이다. 우리는 선전 포고의 권한을 가진 대통령을 만들 것이다."

 

한 명의 대통령은 분명 전체 입법권자를 통제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미국 헌법은 전쟁 선포의 권한을 의회에게 부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권한을 어떻게 훔칠 수 있을까? 1944년 CFR은 다음과 같은 국무부의 메모를 준비했다.

 

"우리의 어려움은 오로지 의회만이 전쟁을 선포할 수 있다는 헌법 조항에 있다. 이 문제는 국제 조약이 이 장애물을 넘을 수 있다는 조항을 만듬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 치안 활동으로써의 우리의 참여가 국제 안보 기구(유엔)에 의해서 장려될 수 있으며, 반드시 전쟁으로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상원은 유엔 헌장을 인준함으로써 전쟁 선포라는 스스로의 권한을 효과적으로 포기했으며, 그 이후에는 한번도 사용된 적이 없다. 트루만 대통령은 의회의 자문을 구하지 않고 한국에 군대를 보냈다. 1950년 7월 29일 기자 간담회에서 트루만은 이렇게 설명한다. "우리는 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치안 활동입니다." 미국은 한국에서 10만명을 잃었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시길 바란다. 그것은 전쟁이 아니라 "치안 활동"이었다. 그의 발언은 확실히 오웰리안적 의미의 권력(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등장하는 빅 브러더)에 대한 증명이다.

 

 

 

중국의 공산화와 압록강 인해전술은 미국의 연출

 

의회는 트루만의 행동을 정력적으로 반대하지 않았다. 일루미나티가 영리한 카드 게임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회에서 가장 강력한 유엔 반대자들은 확고한 반공산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중국의 공산화를 허용(사실은 적극 추진)한 것에 대해서 트루만의 국무부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한국의 경우, 트루만은 공산주의의 침공을 막기 위해 미군을 보냄으로써 속죄하는 것처럼 보였다. 보수적 의원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만약 그들이 의회의 특권을 행사한다면, 급속히 밀려드는 김일성의 공산군에게 한국을 내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속아서는 안된다. 배후에 있던 일루미나티는 미국 정부를 공산주의와 싸우게 할 의도가 없었다. 유엔군 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는 고생 끝에 이것을 배웠다. 맥아더는 북한군 격퇴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중국과의 경계인 압록강까지 북한의 대부분을 공산주의로부터 해방시켰다. 이 시점에 붉은 중국은 병력을 쏟아 부었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넘어 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압록강 철교 폭파를 명령했다. 그러나 그의 명령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국방부 장관 조지 마샬에 의해 철회되었다.

 

마샬은 CFR과 한 패였으며, 5성 견장을 달고 있는 유다였다. 그는 1941년에도 일본의 진주만 공격에 대한 사전 정보를 숨김으로써 그의 장병들을 배신한 바 있다. 1945년부터 1949년 동안 중국 특임 대사와 국무 장관을 지낸 그는 공산주의를 대표한 조작을 통해서 수백만의 중국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이제 국방장관인 그는, "제한전"이라는 신개념에 그의 병사들을 엮어서 다시 한번 공산주의의 공모에 봉사한다.

 

승리는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었으며, Foreign Affairs 의 유명한 “Mr. X” article 이라는 글에서 기원한 "견제"라는 개념으로 대체되었다. 마샬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던 조 매카시 상원의원은, 1951년 그의 책 America’s Retreat from Victory: The Story of George Catlett Marshall 에서 마샬을 비난한다. 예상대로 매카시는 사망으로 마감했고, 그의 명예는 매카시즘이라는 강박관념으로 비하되었다. 반면 마샬은 195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맥아더 장군은 압록강 철교를 건드리지 않은 채 병사들을 두고 그대로 떠나라는 마샬의 명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때 나는 처음으로 병사들과 부대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한 나의 군사적 권한의 사용이 거부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게 있어서, 이것은 비참한 한국의 미래 상황을 분명하게 예시하는 것이었으며, 내게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을 주었다."

 

당시 수천의 미군 병사들이 희생되었고, 맥아더는 한국에서의 지휘권을 박탈당했다. 패튼 장군처럼, 일단 임무를 수행하고 난 그는 그저 소모품이었다.

 

 

 

트루만 쇼

 

1950년 해리 트루만의 성명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나는 대만에 대한 어떤 공격도 가능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7함대에게 명령했습니다. 이것에 대한 필연적인 결과로써, 나는 대만의 중국 정부에게 본토에 대한 모든 공격을 중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지켜졌는지 7함대가 볼 것입니다."

 

여기서 조커는 "필연적인 결과"라는 문구이다. 대만의 장개석과 그의 국민당 군대는 아직 지배력이 약한 공산당으로부터 본토를 되찾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트루만은 본토 공격에 대한 장개석의 위협을 제거해 줌으로써, 공산군이 안심하고 압록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하여 주었다. 사실상 트루만은 미군 병사를 살해하고 있던 공산군의 옆구리를 보호해 준 것이다. 뒤이은 월남전의 현실 정치를 공부한 학생들이라면 누구도 이러한 사실들에 그다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워싱턴의 "교전 수칙"은 6개월 짜리 승리를 14년의 패배와 5만 8천 미군 병사들의 죽음으로 바꾸었다. 중공군 장군 린 뱌오는 후일 이렇게 기술했다.

 

"만약 워싱턴이 우리의 보급과 통신에 대한 맥아더의 적절한 보복적 조치들을 제어해 준다는 확신을 주지 않았다면, 나는 병사들의 목숨과 나의 명성을 무릅쓰고 결코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큰 아이러니는 아마 이것일 것이다. 소련은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이 가진 거부권을 행사함으로써 유엔의 한국전 개입을 간단히 막을 수 있었다. 김일성은 그들의 꼭두각시였다. 그러나 유엔의 한국전 개입을 결정하는 표결일에 소련 대표는 불참했다. 붉은 중국을 상임 이사국에 앉히기 위한 시도가 실패하자, 소련 대표단은 항의의 표시로써 퇴장하고 있었다. 유엔 사무총장 트뤼그베 리는 소련의 유엔 대사 야곱 말릭을 초대하여 투표를 권유했으나, 말릭은 거부했다. 역사가들은 이것을 "소비에트의 실수"로 묘사한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좀처럼 실수하지 않는 법이다. 만약 말릭이 실수했다면, 스탈린은 그를 벽에다 못박았을 것이다.

 

 

 

세계 정부를 위한 제물

 

한국전의 승리는 양측 모두에게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평화 유지자"로써의 유엔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이 세계 정부의 제단위에서 민간인을 포함하여 3백만이 목숨을 바쳤다. 1953년 전쟁이 끝났을 때 남북의 경계는 처음 시작할 때의 그 위치, 38선 그대로였다. 마크 클라크 장군은 이렇게 말한다.

 

"정부의 지시를 수행함에 따라서, 나는 승리없이 휴전에 서명한 최초의 미군 사령관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게 되었다."

 

참조 : Exploding the Korean War Lies

출처 : https://www.wassada.com/bbs_detail.php?bbs_num=14473&tb=board_discuss&id=&num=&pg=&start=15

 

출처: https://jamesperloff.com/2014/03/29/the-korean-war-another-conflict-that-served-the-illuminati-agenda/

 

 

 

 

  1. 애치슨 연설은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한국전쟁계획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지혜의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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