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주사위는 던져 졌다

 

던져 진 주사위

 

 

아래 세계 지도에서 

극동, 동북 아시아를 돋보기로 들여다보자, 

왜?

내가 한국에 살고 있으니까!

 

 

 

 1942년, 제 2차 세계 대전 후 새로운 세계 질서 지도

 

 

■The Post World War II New World Order Map


▲1942년, 제 2 차 세계 대전 후 새로운 세계 질서지도

 

The Post War II New World Order Map: 

A Proposal to Re-arrange the World after an Allied Victory

<출처> http://www.globalresearch.ca/articlePictures/map1942world1600.jpg

 

위 지도에서

현재의 중국, 한국,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말라야가 노란색으로 같은 색깔이다.

 

그런데

 

"2차 대전이 끝난 후,

전쟁 승리 직전인 1945년 7월 미 국무차관보 제임스던(James C. Dunn)이

한반도 분할 방안을 짜라고 지시를 내렸고, 

8월에 육군부 작전국의 Charles H. Bonesteel 대령과 Dean Rusk 중령이 

38선을 채택하였다고 한다."

 

38°에서 분할하기로 결심하기까지는 “10초의 시간이 걸렸다. 고 하는데,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print.asp?ctcd=C03&nNewsNumb=002351100007

 

 

그 10초 때문에 남북한 사람들은 지금까지 피눈물을 흘린다.

 

1950년 6.25 전쟁은 왜 한거야?

미친놈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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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의 미아리고개(1956)


단장(斷腸) : 몹시 슬퍼서 창자가 끊어지는 듯함.

한(恨) :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

 


▲이해연 - 단장의 미아리고개 (195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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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 특집 | 인물로 본 해방정국의 풍경] 

38도 선을 그은 로즈장학생 세 사람 

 


▲ (왼쪽부터) 조지 링컨. 찰스 본스틸. 딘 러스크.

 

 

1900년대의 초엽, 생산성이 미덕인 초기 자본주의 사회를 바라보며 많은 기대와 우려에 젖어 있던 학자들 가운데 대표적 인물이 막스 베버(Max Weber)였다. 그는 자본주의의 미래를 포기할 순 없지만 장애 요인을 예언하면서 ‘기독교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1905)을 썼다. 그는 그 글에서 노동자의 과도한 요구와 훈련되지 않은 자유의지의 질주, 그리고 자본가의 탐욕이 자본주의의 미래를 어둡게 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는 특별히 세 번째 사항을 강조하면서 현대사에서 가장 위대하게 살다간 자본가로 세실 로즈(Cecile J. Rhodes·1853~1902)를 지칭했다.

   

   세실 로즈는 영국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한 뒤 남아프리카로 이주했다. 그는 열혈한 식민지주의자로서 다이아몬드광산으로 큰돈을 벌어 한 식민지를 건설하여 자기 이름을 따 로디지아(Rhodesia)라 짓고 로즈대학(Rhodes University)을 설립했으며 죽을 때는 유산 600만파운드로 로즈장학재단(Rhodes Scholar)을 만들어, 영연방국가 및 독일에서 준재를 뽑아 옥스퍼드대학에 유학시키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 경영을 최고의 은행 가문인 로즈차일드(Nathan Rothschild)에게 맡겼다.(1977년까지 여학생은 응모 자격이 없었다.) 그를 극찬하는 역사학자들은 세실 로즈를 남아프리카의 워싱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젊은 로즈장학생들의 야망과 오만

   

   미국의 공황기인 1930년대, 야망에 찬 젊은이들이 로즈장학생에 도전했다. 그들 가운데에는 조지 링컨(George A. Lincoln·1907~1975), 찰스 본스틸(Charles H. Bonesteel III·1909~1977), 그리고 딘 러스크(Dean Rusk·1909~1994)가 있었다. 이 세 사람은 훗날 한반도에 38도선을 긋는 당사자들이다.

   

   링컨은 1929년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전쟁성 작전국 전략정책팀(Strategy and Policy Group)에 배속되어 마셜(George C. Marshall) 장군의 작전 참모로 일하다가 1929~1933년에 로즈장학생으로 선발돼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과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귀국했다. 한국전쟁 당시 8군 사령관을 지낸 테일러(Maxwell D. Taylor) 장군이 회고록에서 “링컨은 미국 역사상 명석한 장군 가운데 하나”였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그가 유능한 군인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그는 귀국하여 전쟁성 맥클로이(John McCloy) 차관의 부관으로 활약하다가 1945년에 준장으로 승진했다.

   

   본스틸은 명문 장군 가문에서 출생하여 육군사관학교를 다녔는데(1931~1935) 무슨 연유였는지 진득이(tick)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는 육사를 졸업하자 곧 로즈장학생으로 뽑혀 옥스퍼드대학에 유학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유럽 전구에서 활약했다.

   

   조지아주 출신인 러스크는 아일랜드 이민의 후손으로 할머니는 밀가루 포대로 남편의 바지를 만들어 입힐 정도로 가난하고 근검했다. 아버지는 목사였으나 목소리에 문제가 생겨 우편배달부로 전업을 했고 어머니는 교사였다. 러스크는 노스캐롤라이나의 데이비드슨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학군장교(ROTC) 훈련을 받았다. 미국 남부 최고의 명문인 이 대학은 “가난뱅이들의 프린스턴대학”이라는 평판을 들었으며 로즈장학생을 33명 배출했다는 것을 긍지로 삼고 있었다. 그는 1931~1934년에 로즈장학생이 되어 옥스퍼드대학에서 철학과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는데 늘 수업이 시작되기 15~20분 전에 교실에 들어가 기다렸다. 별명이 엘리야(Elijah)였던 그는 한때 목사가 될까 하는 생각도 가졌다. 졸업식에서 세실평화상(Cecil Peace Prize)을 받은 그는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귀국했다.

   

   귀국한 뒤 러스크는 버클리대학교 로스쿨에서 공부를 한 다음 밀스칼리지(Mills College)의 교수로 근무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러스크는 1940년에 대위로 다시 입대하여 인도-버마-중국 전구에서 복무하다가 전쟁성으로 전보되어 정보국(G-2)을 창설하고 작전국 참모과장(Deputy Chief of Staff)으로 활약했다. 이때 그는 윗선으로부터 “인도차이나반도가 중국 북쪽에 있는지 남쪽에 있는지를 알아보는 정도”의 일을 했다고 자신의 회고록(As I Saw It)에서 투덜거리고 있다.

   

   이들의 위상을 좀 더 밝히기 위해 후일담을 첨가한다면, 링컨은 종전과 더불어 육군사관학교로 돌아가 사회과학부장을 역임했으며, 미국 사람으로서는 희한하게도 사람들이 그의 회갑기념논문집(Issue of National Security in the 1970’s : Essays Presented to Colonel George A. Lincoln on His Sixtieth Birthday : New York, Frederick A. Praeger, 1967)을 출판했는데,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가 장군의 자격으로 기고한 것이 눈길을 끈다. 그가 1975년에 죽었을 때 현직 대통령인 포드(Gerald Ford)가 조사(弔辭)를 발표했다. 본스틸은 그 뒤 무운을 떨쳐 육군대장으로 1966~1969년에 주한 유엔군사령관 겸 미8군사령관을 역임한 바로 그 인물이다.

   

   딘 러스크는 한국전쟁 뒤에 록펠러재단 이사장으로 근무하다가 봉급이 25분의 1 수준인 국무장관에 발탁되어 1961년부터 1969년까지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대통령 아래에서 8년간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직업”을 즐겼다. 그 정도의 손실을 감수하면서도 그 자리로 간 것을 보면 그의 권력 의지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재임 중에도 동네 공동세탁소에 가서 아줌마들과 25센트 동전을 넣으며 세탁을 했다. 은퇴할 때는 소득세신고 자료와 지인들의 연락처가 담긴 수첩만 들고 나왔다. 정계 은퇴 뒤에는 조지아대학에서 강의했다. 그는 부부 가운데 한 사람은 살아남아 자식들을 돌보아야 한다면서 평생 아내와 한 비행기를 타지 않을 만큼 섬세한 사람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하와이가 피격되자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은 1944년 11월 29일, 전시 작전의 효율과 속도를 높이고자 국무성(State Department)과 전쟁성(War Department)과 해군성(Navy Department)에서 중견 엘리트 관료를 차출하여 3성조정위원회(State-War-Navy Coordinating Committee)라는 비상 기구를 만들어 그 첫 글자를 따서 SWNCC(swiŋk)라고 불렀다. 장소는 지금 백악관의 비서실로 쓰고 있는 별채에 두었다.

   

   

   운명의 1945년 8월 11일 02시

   

   3성조정위원회의 구성을 보면 위원장은 국무성 대표인 던(James C. Dunn, Acting Secretary of State), 전쟁성 대표인 맥클로이(John McCloy, Assistant Secretary of War), 해군성 대표인 바드(Ralph A. Bard, Under-Secretary of Navy)였다. 던은 유럽 외교가에서 잔뼈가 굵은 직업외교관이었고, 맥클로이는 하버드대학 출신으로서 지금의 CIA(중앙정보국)의 전신인 해외전략국(OSS)을 창설하고 국가안보회의(NSC)의 책임을 맡고 있는 실세였다. 바드는 전직 은행가로서 해군성에 투신하여 차관의 직책을 맡고 있는 원폭 전문가였다. 이 협의체가 전시에 필요했던 모임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여기에서 군부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세 부서에서 유능한 인재를 차출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로즈 장학생들을 중심으로 3성조정위원회가 조직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한 같은 또래의 링컨과 본스틸과 러스크가 자연스럽게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학자로서 편한 길을 갈 수도 있었던 러스크가 군문에 뛰어든 것은 나름대로의 야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수재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들은 박사학위 논문을 쓰지 않는 전통이 있었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들의 논문을 심사할 만한 인물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또한 논문을 써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랬듯이, 각주(footnote)를 달지 않았다. “우리의 주장이 곧 학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괴벽스럽고 까칠한(offbeat and eccentric)” 인물들임을 잘 알고 있었다.

   

   3성조정위원회는 대통령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어느 부서보다도 영향력이 큰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제 30대 중반의 청년 장교들은 경륜보다는 투지와 야망, 그리고 조국을 위해 봉사한다는 자부심으로 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늘같이 높은 장군이나 사령관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도 않아 마찰을 빚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마찰과는 관계없이 대통령의 막중한 신뢰를 받으면서 그들은 전쟁의 큰 틀을 짜가고 있었다.

 


▲ 찰스 본스틸이 38°선을 그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만든 벽걸이 지도. 
서울과 인천이 포함되는 38°선을 그어 링컨 소장에게 보고했다.

 

 

한국 문제와 관련하여 그들에게 부여된 명령은 이른바 맥아더사령부가 수행해야 할 ‘일반 명령 제1호(General Order No. One)’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시국이 그렇다 보니 그들은 사무실에서 기숙했다. 1945년 8월 11일 02시, 링컨 소장은 책상 위에 다리를 걸치고 뉴욕타임스(NYT)를 읽고 있었다. 그때 링컨은 의장인 던으로부터 소련군이 한반도에서 남진한다는 사실과 이에 대한 대응책을 강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링컨은 본스틸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과 인천이 포함되는 선에서 남북을 분할하여 일본군의 항복을 받을 수 있는 군사상의 분계선을 그으라고 지시했다. 본스틸은 서가를 뒤져 조선의 지도를 찾았으나 마땅한 지도가 없어 고민하다가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에서 만든 벽걸이 지도를 보고 30분 동안 궁리 끝에 푸른 잉크로 서울과 인천이 포함되는 38°선을 그어 링컨 소장에게 보고했다.

   

   샌더스키(Michael C. Sandusky)의 기록에 따르면, 본스틸이 링컨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극동의 지도를 바라보며 38°에서 분할하기로 결심하기까지는 “10초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허둥대며 급작스러운 작업(crash operation)으로 일을 마치고 이를 링컨에게 보고했고, 이 분할안은 합동참모본부(JCS)와 3성조정위원회를 거쳐 3개 부처 장관인 번스(James Byrnes) 국무장관, 스팀슨(H. Stimson) 전쟁장관, 포레스털(J. V. Forrestal) 해군장관에게 보고된 후 최종적으로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최종적으로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달되었다.

   

   이상의 기록 중에서 그 복잡하고 방대한 ‘일반 명령 제1호’의 초안(草案)을 30분 만에 작성했다는 대목이 미덥지 않다. 그토록 중요한 문서가 30분 만에 작성되었다는 것은 그 문서가 이미 사전에 구상되어 있었거나 작성되어 있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런데 러스크는 필자와의 서면 인터뷰(1986년)와 그의 회고록(124쪽)에서도 그날 밤에 벽걸이 지도를 보고 서울과 인천이 포함되는 선을 고민하던 중에 38°선이 눈에 띄어 그 선을 분단선으로 삼았다고 답변했는데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왜냐하면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문제의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도는 너무 작아 위도(緯度)가 1° 단위로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10° 단위로 그려져 있어서 38°선이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낮게 내려온 분단의 비극성

   

   그렇다면 여기에 하나의 원초적인 의문이 있다. 한반도를 분할하면서 왜 하필이면 38°선이었을까? 분단선이 39°만 되었더라도 김일성은 개전을 결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에 이 질문은 중요하다. 이 문제는 1945년 7월의 포츠담(Potsdam)회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회의에서 수뇌 회담을 마치고 실무 회담(7월 26일)으로 미국의 참모총장 마셜(George C. Marshall)과 소련의 참모총장 안토노프(A. B. Antonov)의 회담이 있었는데, 이 회담을 위해 미리 제시된 회의 안건으로 2일 전에 동해안의 해상 작전 지역의 기점(起點)으로 38°선이 제시된 바 있다.

   

   이때 마셜은 작전국장 헐(John E. Hull)을 불러 미국과 소련의 분계선을 검토하도록 지시했고 이에 따라 헐은 한국 지도를 놓고 검토한 결과 서울과 2대 항구(부산·인천)가 포함되는 분할선을 구상했다. 인천을 중시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곳에 미군포로수용소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헐의 부하였던 링컨은 포츠담에 머물면서 헐의 지시에 따라 한반도 분할선의 획정 작업에 참여한 바 있었기 때문에 그가 귀국하여 3부조정위원회의 전쟁성 측 대표로 SWNCC에서 작업할 당시 헐 국장의 지시를 유념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38°선의 분할안이 확정되자 합동기획참모부(JPS)의 가드너(M. B. Gardner) 제독은 39°까지 분할선을 북상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40°까지 북상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링컨 소장은 “소련이 그 안을 받아들이지도 않을 뿐더러 현실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미군을 38°까지 북진시킬 수도 없다”는 이유를 들어 39°선을 반대했다. 일개 육군 준장의 목소리가 해군 수뇌부의 의견을 압도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분단이 확정된 다음 미국은 소련이 이를 선선히 응낙한 데 놀랐고, 소련은 위도가 그토록 남쪽으로 내려간 데 놀랐다. 사실상 소련군의 남한 진주계획도에 따르면, 그들은 일본의 나남 19사단과 용산 20사단의 작전 경계선인 38° 45˝ 이남의 진주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3성조정위원회의 38°선의 배경에 대하여 다른 주장이 있다. 당시 국무성 정책기획참모국(Policy Planning Staff)의 요원이었던 마셜(Charles B. Marshall)의 증언에 따르면 포츠담회담에서 소련의 안토노프 장군과 미국의 마셜 장군이 합의한 작전 관할 영역은 동해에서의 잠수함 작전 영역을 감안하여 북쪽의 사할린과 북부 홋카이도의 중간 지점인 소야해협(宗谷海峽·La Perouse)에서 시작하여 남쪽으로 포물선을 그리고 내려오면서 동해를 지나 한반도 동해안에 닿게 하되 소련은 그 선의 북쪽에서, 미국은 그 남쪽에서 작전을 전개하도록 합의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지도의 기하학적 설명이다. 통상적으로 지도를 긋는다면 왼쪽에서 시작하여 오른쪽으로 긋는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38°선은 그렇지 않고 동해안에서 그어진 선이 좌향으로 한반도를 지나 서해까지 연장한 것이었다. 따라서 러스크가 자신이 분할선을 결정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공명심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아무리 전시라고 할지라도 미국의 그토록 중대한 국가 이익이 두 명의 영관 장교에 의해서 결정될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다고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마셜은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위도에 의한 분할은 해상이나 대평원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며 육지에서는 강이나 산의 능선 또는 기존의 행정구역에 따르는 것이 통례라고 주장한다.

   

   38°선 분할의 피해당사자인 우리로서는 회한이 많다.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도마 위의 생선처럼 잘린 것도 슬프거니와 거기에 투영된 청년 장교들의 오만과 경솔함이 원망스럽다. 역사를 돌아보면 지식을 갖추지 못한 오만은 무모하고 남에게 상처를 준다. 한국 분단의 과정을 보노라면 그런 느낌이 더욱 가슴을 친다.

 

주간조선 [2351호] 2015.04.06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1973년, 로마 클럽을 통해 발표한 세계 정부의 구상

 

■ 1973년 일루미나티 하부 조직인 로마 클럽이 던진 주사위

▲1973년 일루미나티 하부 조직인 로마 클럽을 통해 발표한 세계 정부의 구상

 

남한과 일본은 같은 색깔로 통합되어 있고

북한과 중국은 같은 색깔로 통합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이코패스들이 1973년도에

한 번 더 38선에 못 박고

남북분단을 고착화 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멀쩡하게

잘 살도록 그냥 놔 두면서

 

전범국가(戰犯國家)도 아닌 한반도만 분단국으로 만들어 놓고

유독 남한과 북한에만 잔인한 이유가 뭐야?

 

왜, 이렇게 공격적으로 한반도를 괴롭히며 극한으로 내몰고 있는 건데?

 

70년대 남한 대중가요를 들어보면

절 절한 이별 노래들이 수두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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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티김-이별(1973)

 


양희은 -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1973)

 


▲ [제1회 '77 MBC 대학가요제] 샌드페블즈-나 어떡해 (실황)

 

 

 

그런데

 

 

 MDG(Millennium Development Goals) Indicators

 

■ 2009년 UN이 던진 주사위

▲United Nations Millennium Development Goals Report 2009

 

 

남한과 북한은 통일이 되어 

한국, 중국, 몽골 이렇게 3 국가가 같은 색깔로 재편되었고

일본은 호주와 같은 색깔로 재편된 것을 알 수 있다.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에 빠져 죽을 자 누구인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임기 2007년 1월 1일 ~ 2016년 12월 31일 동안 

한반도가 통일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는데

UN에서 뭘한거야~

 

 

도대체 이해가 안된다.

 

대한민국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임기 2008년 2월 25일 ~ 2013년 2월 24일이고 

 

 

■ MDG 2015년

▲United Nations Millennium Development Goals Report 2015

 

 

대한민국에서는 2016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광화문 촛불 쓰나미가 있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을 당했다.

임기 : 2013년 2월 25일 ~ 2017년 3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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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한 광화문 촛불 쓰나미

 

 

 


▲권서경&고은성 Musica

 

 

 

 

 SDG(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Indicators 

 

 

SDG 2017년

 

Regional groupings used in 2017 Report and Statistical Annex

<출처> https://unstats.un.org/sdgs/indicators/regional-groups/

 
 
 
 

 

   One World (세계 정부)_세계가 하나의 색깔이면서 농도로 표시

 

■ SDG2019년, 하나의 색깔(UN블루)_UNITED NATIONS BLUE

▲Sustainable Development Report Dashboards 2019

 

Transformations to Achieve the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바티칸 문장(紋章)과 one world

▲바티칸 문장(紋章), one world

 

 

UN과 바티칸이 추구하는 세계는 One World(세계정부) 이다.

나타내는 방법도 교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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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지혜의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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